목소리들
2014년과 2020년 이루어진 언니들의 구술 인터뷰 자료와 2021년 활동가 및 완월동 인근 주민들의 구술 자료를 분류 및 분석하여 다양한 위치에 있는 주체들이 인식하는 완월동 공간을 그려보는 작업이다. 완월동의 내부와 외부, 일상화된 착취 구조, 공간과 사람들, 시간과 역사적 의미를 사람들의 목소리를 통해 면밀하게 살펴보고자 한다.
목소리들
2014년과 2020년 이루어진 언니들의 구술 인터뷰 자료와 2021년 활동가 및 완월동 인근 주민들의 구술 자료를 분류 및 분석하여 다양한 위치에 있는 주체들이 인식하는 완월동 공간을 그려보는 작업이다. 완월동의 내부와 외부, 일상화된 착취 구조, 공간과 사람들, 시간과 역사적 의미를 사람들의 목소리를 통해 면밀하게 살펴보고자 한다.
제가 왔을 때 주립의원을 얘기했었잖아요. 다른 집결지 같은 경우에는 그렇게 성병 검사 일명 말하는 성병 검사를 그렇게 정기적으로 하지 않아요. 근데 완월동은 그렇게 의원을 두고 병원을 두고 여성분들이 정기적으로 그렇게 성병 검사를 하는 게 완월동만 있던 것 같아요.
그게 아직도 선택이다, 라는 생각을 많이 하는 것 같아요. 시민들도 그렇고. 일반 여성들도 그런 생각을 많이 하는 것 같아요. 특히 그들이 돈을 받으니까 본인이 선택한 거 아니냐 하는 생각들을 많이 하는 것 같아요.
여자 출입 금지. 근데 나 어릴 때도 우리 부모님은 그런 얘기 전혀 안 했다니까요, 내한테. 가지 마라 말도 안 하고 나쁜 곳이라 말도 안 하는데 어떤 가면 안 된다는 걸 .. 친구들이 조금 이상한 얘기를 하는 거예요. (...) 어쨌든 어른들이 대놓고는 안 해도 .. 내가 교회를 다니다 보니까 뭐 이제 그런 남자 애들이 확 이렇게 한마디로 던지는 말 있잖아요. 그런 게 저기 이상한 곳이구나. 성을 매매한다는 거는 이제 그냥 누가 꼭 말을 안 해도 이제 그냥 그런 곳이구나 하고 커서는 알게 됐죠. 그리고 딴 거 보다도 친구들하고 같이 지나가면 남자들을 걔들을 잡아요. 동네 아줌마들이...
처음에 왔을 때는 이제 완월동은 이미 그 우리들 업소에서 일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이미 완월동은 되게 유명했었고 완월동 같은 경우는 이제 막 거의 집결지는 거의 마지막 코스라고 생각을 하니까.
거기서 그러니까 친구들은 초등학교 그쪽 친구였고. 제가 태어난 완월동 1가 1번지 같은 경우는 충무는 완전 아래쪽 시장인데 이름이 이제 그렇다 보니까 그게 한 80대 초 정도의 조금 동네 이름이 수치스럽다라고 하는 민원이 있어가지고. 충무동 2가로 이름이 바뀌었죠.
얘기 안 해요. 그거는 서로. 그건 불문율이라고 해야 하나 알면서도 그냥 넘어가는 거야. 뭐라고 얘기를 하겠어요. 그런 부분에 대해서 세세하게 의논하고 토론하고. 그거는 아니지. (...) 완월동 옆에 어린이집이 두 개가 있어. 그 선생님들도 택시 타고 남부민동 새마을금고 이쪽을 얘기하면 택시 기사도 몰라. 근데 완월동하면 찾아가. 그것 때문에 이제 완월동 얘기하면은 선생님들도 그런 시선을 느낀대. 그 이 여자가 완월동 있는 여자인가. 젊은 여자들 같은 경우에는 그런 시선을 갖다가 느낄 수밖에 없어요.
그 당시에는 이렇게 막 학생들 지나다니고 하면 막 잡고 이랬거든. 그런 게 많아서 좀 불편한 게 있었지. 그 당시에는 활성화 되면서 밑에 이쪽으로도 더 많았었거든. 학교 가면 아이들이 니 완월동 사나 하면서 이런 말을 할 때는 우리 아들이 억수로 안 좋다고 내 보고. 우리 아들은 지금까지 하는 게 왜 엄마는 하필 이 동네와 살았냐고 이 말을 해. (...) 제일 힘든 건 우리 아이가 어디 다니면 니 완월동 좋은 동네 사네 이런 말 하는 게 애가 스트레스 받아갖고. 엄마가 여기도 사람 사는 곳이고 충무동이다. 충무동에서 오래 살다 보니까 내가 이래이래 됐다 이렇게 말을 하고.
..섬과 육지. 완월동은 그 사이. 경계에 있는 것 같아. 여기서 가면 섬으로 가고. 육지의 끝 같은 느낌이었거든요 여기서 가면.
솔직히 이거는 한국이 갖고 있는 문제예요. 일제 잔재고 근데 뭐 물론 이제 없앨 수도 있죠. 근데 그 이후에 우리가 6.25도 겪으면서 또 다시 활용을 하는 되풀이를 했었고. (...) 저 같은 경우도 부채의식은 있고 책임감도 느껴지거든요.
나, 우리 모두의 아픈 공간? 특히 남성들은 돌아보기(성찰하기) 싫어하는 공간?성착취의공간? 트라우마의 공간?외면하고 싶은 공간. 이런 거 아닐까요? 외면하고 그냥 생각하고 싶지 않은 공간. 근데 일부 남자들한테는 자기들끼리의 유희의 공간.
관광 명소죠. 최대의 관광지죠. 그리고 이게 여성분을 또 아는 분들도 하나의 관광지처럼. 어 그런 곳이 있대. 한번 가볼까. 이런 식으로.
부산에서의 완월동은 뭐랄까 배타는 선원들이 주로 가고 그러니까 배가 들어오고 하면 처갓집 간다 하니까는. 완월동은 남자들의 처가 동네라 할까. 그 정도로 남자들의 뭐 자기들의 꿈을 꿈이랄까 뭐랄까. 한 번 욕망. 그런 거죠. 젊은 아들 군대가기 전에 우리 저기 가서 한 번 갔다 가자 이래가지고 여기 와 가지고 첫 경험 하고 가자 하고.
처음에 우리 왔을 때 시간에 만 원, 삼만 원 그랬다고. 잠자는 거 삼만 원, 오만 원. 제일장에서는 십만 원인가 그랬다고 하더라고. 나는 오만 원 받았어. 그러고 나서 제일장에 불이 크게 났어. 아가씨인가 손님인가 죽었어. 그때 난리 났었다. 그래서 다 수리하고 했잖아.
그때가 1970년도 그리고 또 완월동 이쪽도 보면 전부 목조 건물이였어요. 내 어릴 때 아마 이게 큰 불이 났을 거야. 예전에 어릴 때 하여튼 큰 불이 나서 그때 이후로 이게 전부 다 이제 건물이 콘크리트 건물로 해가 다 지은 걸로 알고 있어요.
70년대 그렇게 호황기는 아닌데 심각한 거는 처음에는 이쪽만 이렇게 중고등학교 때는 이쪽만 있다가 어느 순간인가 이게 도로를 중심으로 길 건너편에 널려있다가 지금 완전히 죽었잖아요. 안쪽에만 있다가 길가도 하기 시작을 했고요. 길가 입구도 하기 시작했고 심할 때는 이제 길 건너 편에 주택도 아줌마들이 전부 서서 거기 이제 분홍색 불 켜놓고 해서 그 정도로 많이 확산이 됐어요. 그게 80년도쯤 되지 않을까 싶은.
어렸을 때 풍경은 우리가 지나다니면서 보면은 그때만 해도 판자촌 집이 많았어요. 판자촌 집 입구에 여자들이 나와서 앉아 있고 그럴 때 지나가다 보면은 우물물 떠가지고 목욕하는 그런 모습도 보고 밖에서 그냥 보이게....
우리도 길을 건너 다녔어요. (중략) 나는 내 같은 경우는 피했다. 내가 이렇게 이제 좀 그래갖고 .....우리 남편은 이쪽으로 다녀도 큰 길로 와도 이제 누가 막 잡는가 봐 .... 남자들은 혼자 다니는 게 좀 그렇고.진짜 휘황찬란했어요. 그때 80년대.
사라진 풍경이 뭐 완월동 이쪽으로는 크게 변한 게 없습니다. 그대로 있고요.(중략) 뭐 다 재래시장도 그대로고 공동어시장도 아직 그대로고 크게 뭐 여기는 그런 게 없어요.
저 동네가 일제시대에 생겼잖아요. (…) 일제 잔재의 의미, 민족을 지배하는 하나의 수단으로서의 공간. 거기서 가장 좋은 컨셉이 여성이었고, 그래서 여성을 통해서 한국을 지배했던 공간. 그래서 마음껏 조롱했던 공간이 아닌가. 그런 생각을 해봐요.
완월동을 통해서 하나의 성을 바라보는 리트머스 시험지가 될 수 있지 않을까 그런 식으로도 접근해도 시대별로 완월동을 바라보는 걸 끊어서 이를 해보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