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소리들

2014년과 2020년 이루어진 언니들의 구술 인터뷰 자료와 2021년 활동가 및 완월동 인근 주민들의 구술 자료를 분류 및 분석하여 다양한 위치에 있는 주체들이 인식하는 완월동 공간을 그려보는 작업이다. 완월동의 내부와 외부, 일상화된 착취 구조, 공간과 사람들, 시간과 역사적 의미를 사람들의 목소리를 통해 면밀하게 살펴보고자 한다.



목소리들

2014년과 2020년 이루어진 언니들의 구술 인터뷰 자료와 2021년 활동가 및 완월동 인근 주민들의 구술 자료를 분류 및 분석하여 다양한 위치에 있는 주체들이 인식하는 완월동 공간을 그려보는 작업이다. 완월동의 내부와 외부, 일상화된 착취 구조, 공간과 사람들, 시간과 역사적 의미를 사람들의 목소리를 통해 면밀하게 살펴보고자 한다.


성폭력 문제는 누구나 여성인권문제라고 생각을 하는데 성착취 문제는 그때까지만 해도 여성인권문제라는 인식이 없었어요. 여성들 스스로도 그런 인식이 없었고 사회는 뭐 더했고. 그래서 제가 동두천에 기지촌활동을 갔을 때 놀란 것이, 완전히 그 동네는 자기만의 법이 있는 동네더라고요. 기지촌은 또 되게 특이한 굉장히 폐쇄적인 분위기가 있어서 가령, 그 거리에 젊은 여자로서의 몸을 가지고 내가 걸어 다닐 때 그냥 성적 대상화되는 느낌을 받았어요. 그 거리를, 어 클럽들이 있는 그 거리를 골목을 가는 것만으로도.

제가 처음 살림에 출근한 다음날이 총회 날이었는데, 언니 한 명이 탈업소를 한 일을 가지고 해어화라고 그 당시에 여성들 조직이 있었잖아요. 그 회장 언니 방을 업주들이 완전 난장판을 만들어 놓은 거예요. (...) 해어화 대표하고 고문하고 울며불며 우리 정경숙 소장님한테 전화를 해가지고 그 당시에 강혜진 팀장과 정경숙 소장님이 먼저 해어화 대표 방에 갔어. 방이 완전 난장판인데, 이후에 나하고 김신효정 샘한테 맥주를 사 오라는 거야. 완월동 슈퍼 안에서 맥주를 사고, 속이 훤히 보이는 비닐봉지에다가 맥주 열 병을 담아가지고 완월동을 가로 질러서 오라는 거야. 요구사항이 정확했어요.(웃음) 그래서 그거를 들고 완월동을 유유히 가로지르면서 거기 갖다 줬지. 우리는 술 배달을 갔고, 총회는 열려야 되는데 정경숙 소장님은 안 오고. 난리였죠, 그날.

아래를 쫙 이렇게 한 바퀴 다 돌았죠. 그때 막 경찰들도 오고 이렇게 해가지고 최초라고 얘기하더라고요. 그래서 그때 구호 외치면서 낮 시간이기는 했거든요. 아마 2시나 이렇게 됐을 거예요. 한 번은 그렇게 하고 쫙 한 바퀴 돌고 두 번째는 내 기억으로는 약간 한 번 자기들 경험이 있어서 그런지 두 번째는 그 안에 못 들어가게 해가지고.

씨발 쌍년들이 와 가지고 뭐 우리 뭐 다 망하게 하고.. 그런 욕들을 막 많이 듣고 있는데 그런 건 하나도 기억에도 없고 무섭지도 않고 그랬는데 한 명이 똥물 가져와서 부워버리겠다 한 거예요. 근데 이거는 할 수 있는 일이잖아요. 죽여버리겠다 이건 솔직히 조금 약간 그냥 무서워라고 하는 말이지만 진짜 똥물 가져와서 부울 수 있을 것 같은 거예요. 조금 움찔했습니다. 그 말에 움찔한 거예요.

업주들이 한 번 우리 살림에 단체로 쳐들어 왔어. 그래가지고 면담을 한 번 한 적이 있어요. 내가 그 면담하고 난 뒤에 내가 그 얘기를 한 번 사람들한테 한 적이 있어. 욕을 정말, 내가 쌤한테도 그 얘기를 한 적이 있어. 욕을 정말 구체적으로 하시는구나. 그냥, 그냥. 해부학적으로.

그러니까 이게 서서히 뭔가 잠식된다고 할까? 이게 하나 팍 충격적인 사건이 있어서 보다는 그냥 그 모든 순간순간들이. 뭐 그러고 말할 것도 없죠. 업주들이 지나다닐 때마다 욕을, 욕을 엄청나게 한다든지. 그때 카니발로 한 바퀴 돌 뻔 하다가 카니발을 포위해가지고 완전 업주들 수십 명이 카니발을 둘러 싸가지고 카니발이 옴짝달싹 못하게 된 적이 있다든지. 그런 건 말도 못해요.

완월동이 저에게 가지는 의미가 저를 페미니스트로 성장시켜준 공간이면서 그런 여성연대를 체험하게 해 준 공간인 것 같아요. 여성들과 우리 여성 활동가, 여성단체 활동가들의 그 만남, 그리고 저희가 특히 초반에 정말 상담소가 많이 건물이 후지고 열악했을 때 저희를 믿고 그렇게 사건을 진행했던 여성들을 생각하면 그 여성들이 우리를 신뢰할 수 있었던 게 어떻게 보면 좀 기적 같다는 생각이 들거든요. 뭐 자기의 안전과 이런 것이 다 걸린 문젠데.  보기에도 다들 갓 대학 나오고 너무 가진 것 없는 이 사람들을 믿고 했다는 게, 물론 여성들이 절박한 것도 있었지만, 우리를 믿었다는 게 우리가 당시 여성들을 만나면서 같이 그 여성들 눈높이에서 눈을 맞추고 또 우리의 의지와 진심이 전달된 것도 있고 그래서 여성들이 그런 계급이라든가 살아온 환경이라든가 그런 조건들을 넘어서서 여성으로서 만나고 서로 지지할 수 있다는 것을 체험하게 된 공간인 것 같아요. 그것의 힘을 느끼게 된 시간들.

설립한 지 얼마 안 돼서 아웃리치를 가고는 있었는데, 매주. 근데 당시 여성들 선불금 문제가 너무 심각했어요. 다들 거의 1000만원 이상씩 빚이 있었으니까. 거의 갇혀서 생활하고. 그래서 저희는 젊은 혈기에 선불금 이걸 좀 더 공격적으로, 선불금 이거 법적으로 무횬데, 여성들이 이거 나오면 되는 건데, 좀 더 본격적으로 홍보를 하자, 라고 했고 정경숙쌤은 좀 더 앞으로 못들어가게 될 수 있어서 아웃리치를. 좀 더 신중하게 하자는 의견이셨는데, 2:1이니까 우리가 이겨서 그 소식지에다가 선불금 무효를 딱 넣어가지고 주립병원에 가지고 갔어요. 오전에. 네. 바로 막 오더라고요. 업주들이 오고, 그때 그 충초회에 그 총무, 그 두꺼비같이 생긴 그 총무가 와가지고 막 이제 협박을 하더라고요. 맨날 좋은 얘기로, 왜 그 사람 맨날 양복입고 다니잖아요. 좋은 사람인 척, 자기 유식한 척 하더니 그날은 당신들 이런 식으로 나오면 당신들 어느 날 등 뒤에 칼이 꽂혀도 나는 모른다, 어떻게 할 수가, 자기는 안하지만 여기 포주들은 험한 사람이라 그럴 수도 있다는 것처럼 협박을.. 하더라고요. 그래서 그 사람들이 사무실에 쳐들어가서 그때 정경숙쌤이 만삭 상태에서 혼자 계셨는데 막 경찰 부르고 했던 생각이 나요.

전환점이니까. 저한테는 그리고 또 정박은자나 신박진영이 겪어 나가는 거 보면 어떤 힘든 게 있으면 그 안에서 뚫고 나가는 것이야말로 정말 강한 힘을 갖는구나. 그래서 나는 우리 지금 현재 활동하고 있는 친구들은 어쩌면 그 안에서 희망도 보고.

그때 활동가들을 만나서 어떻게 얘기했냐면. 내가 그 공부를 하고 오면서 되게 눈물이 났다. 첫 번째는 우리 활동가들이 너무 무방비 상태로 노출된다. 자기를 어떻게 보고 이것으로부터 돌아가서 어떻게 안전하게 그 경험을 소화시켜내야 되는지를 너무 몰랐다. 그서 몰랐던 나의 나와 우리들에 대한 안타까움과 아쉬움. 그리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 여전히 모르고 있는 우리 활동가에 대한 미안함. 또 나 혼자 떠나와 있는 거에 대한 부채감 굉장히 복잡해서 나는 눈물이 났다 하면서.

긴급구조 당시 생각나는 상황이 있는데,  언니 긴급 구조 해갖고 와서 그냥 짐 찾으러 갔는데 언니가 업소에 있는 샴푸 린스, 치약까지 챙길라 하니까 진짜 너무 막 마음이 아픈 거야. 업주는 ‘언니 그냥 그만 챙기고 가자’ 이러는데, 언니가 이불도 또 챙기래. 그러면은 업주하고 나하고 둘이서 같이 맞잡고 이불을 개고, 결국 이불까지 챙겨가지고 나왔죠. 이게 성구매자들하고 어쨌든 거기에 일할 때 쓰던 이불인데, 그거를 안 가지고 오고 싶을 것 같은데, 실제로는 악착같이 그걸 다 챙기고자 하는 거죠. 언니는 무조건 다 챙기려고 하더라고. 그래서 업주하고 내가 같이 이불을 갠 것들을 다 챙겨가지고 그렇게 가지고 나온 적도 있었어요. 이제 그 심정이 어떤 심정인지는 언니 진술서 받으면서는 이해는 되더라고요.

언니가 이렇게 란제리를 입고 있었는데 팔에 칼로 그은 상처가 너무 많은 거예요. 그래가지고 왜 그랬냐고 물어보니까 칼로 그으면 살아있는 느낌이 난다고, 그래가지고 같이 이렇게 손잡고 울었던 기억이 나요. 그러면서 이제 그렇게 하지 마시라고, 아프니까.

언니들이 그런 이야기했어. 완월동에 10년 20년을 있었는데 바닷가에 한 번 못 가봤대. 그게 되게  마음이 아팠어. 언니하고 바다를 갔는가. 하여튼 바다를 봤는데 그 언니가 그런 이야기를 했어. 여기에 완월동이 있으면 뒤에 이렇게 천마산이 있으면 맞은편에 남항인지 뭔지 해 가지고 여기가 바다라고. 해수욕장도 바로 있어. 그런 거 있으면 뭐하노 언니한테는. (...) 예전에 완월동이 어떻게 얼마나. 이제 착취가 심하고 언니를 돌렸는지 우리가 상상을 하게 되면 오히려. 그래서 그게 더 마음이 아픈 것 같아.

내가 주례섰던 언니.. 제일 기억에 남죠. 그분이 우리 그 성매매 방지법 통과되고 시위할 때.. 완월동 언니들의 조직인 해어화.. 해어화 회장을 했죠. 그때  언니가 본인이 업소를 나와서 결혼 하려고 하는데 자기의 모든 인맥이 완월동에 다 있다 보니까 거기 있는 사람이 주례를 선다는 것은 좀 그렇고.. 자기 남편 될 사람도 딱히 아는 사람도 없다.. 그래서 뭔가 업소를 나왔을 때.. 뭔가 자기가 찾아갈 수 있는 사람, 자기가 신뢰할 수 있는 사람이 나라고 해서 그때 주례를 섰던 기억이 나죠. 그때 우리 활동가들이 결혼식에 엄청 많이 갔죠. 우리 남편도 가고 우리 아들도 가고.. 저기 광안리에서 했는데 사람들이 별로 안 올 줄 알았는데 제법 많이 왔더라고요. 그래서 참 좋았고..  우리 활동가들이 결혼식에 간 것이 언니 축하의 의미도 있지만 혹시나 하객이 너무 작을까 봐서.. 우리 활동가들, 그때 그런 거 참 잘 했거든요.

이 경험을 얘기하려고 하면 목이 틱이 일어나요. 여기가. 막 경보가 울려. 여기가. 그래서 저하고 신체 작업을 하면서 여기에 이제 그림을 막 그려냈거든요. 도대체 여기가 쇠막대기가 막혀 있던데. 나중에 막 통곡을 하면서. 쌤 여기 남자 애들의 성기가 막혀 있는 거 같다. 난 정액이 이만큼 차 있는 것 같다. 내가 더러운 몸이다.  이 목줄기 모두가. 그러면서 이 작업을 한 6개월 정도를 같이  했어요. 그러면서  울기도 울고 막 여러 작업을 하고 그러면서 이제 그녀가 처음 저한테 왔을 때 1회기에, 아 당신이 그런 경험이 있었구나 하니까 이 말을 누군가에게 할까를 늘 찾았다는 거예요. 십 년 동안 근데 이거를 편견 없이 바라봐 줄 사람이 누굴까. 이 경험을 이해해 줄 수 있는 사람이 누굴까.

열여섯 일곱에 이 길에 들어왔대요. 애가 열 살이라는 거야. 친정 엄마가 키운대요. 결혼도 했대. (결혼한) 그 사람이 자기를 완월동에 팔아넘겼대. 완월동 오기 전에 자기 집에 있으면서 성매매를 했던가 봐요. 친정엄마가 잠시 병원에 입원을 하면서 자기가 아이를 봐야 되는 상황이었는데 구매자는 와야 되고. 그래서 애를 침대 밑에 넣었다는 거야. 구매자가 오고 하는데 애가 깼던 거야. 그러고 나서 엄마 뭐야? 하고 애가 나왔던 거야. 그러고 나서 이 애를 엄마한테 다시 돌려보냈다가 완월동으로 왔대요. 그때부터 애를 못 봐. 내가 정말 미친년이에요 그랬어요. 그 순간은 절박하니까 어쩔 수 없이 했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애를 못 쳐다보겠더라는 거예요. 그리고 이 사람이 그때 자포자기였는데 간경화였어요. 유산을 한 7,8번 했었고. 지금 스물아홉인데 저는 죽으면 돼요. 그러고 있는 거야. 저도 막 그거 지금도 얘기하면 소름 돋는다. 너무너무 집에 돌아가고 싶지. 그 경험을 감내하면서 몸도 다 만신창이가 됐고. 막 온몸과 마음이 너무 아팠어. 막 따가웠어.

 언니는 고아인데, 가족들이 다 뿔뿔이 흩어져가지고. 50대였는데.  병원 중환자실에 오래 입원해 있다가 결국 돌아가셨어요. 이 언니가 기초수급자로 임대주택에 살았었거든요. 근데 시신을 인수할 사람이 없어가지고, 결국 구청인가, 동사무소인가에서 언니를 인수하고, 거기 지역 성당에서 장례를 치르는 과정을 같이 해주고 했는데 아무도 연고가 없고 가족도 없고 하다보니까 이 언니를 돌볼 수 있는 사람이 없어서 그냥 생의 마지막을 언니를 같이 지켜봤던 그 시간이 저는 너무 마음이 아파가지고 기억이 많이 남아요. 그 언니가 나이도 많이 젊었죠, 50대 중반도 안 됐었으니까.

자활해서 가게까지 차리고 오랜 기간 가게를 또 유지한 언니. 그때 언니랑도 진짜 열심히 했거든. 그니까 가게 앞에서 유동인구 몇 명인지 하루 종일 앉아.  왜냐면 사회연대 사장이 창업을 하려면 사전 조사서라는 게 있는데 그걸 맞춰서 내야 되는 거야.그때 인수받은 가게가 권리금도 엄청 세고 월세도 엄청 세고. 물론 되게 장사가 잘 되는 가게인데 그리고 이제 밥집을 하는 게 얼마나 힘든 건지 사실 몰랐던 거지. 사실 창업했던 일들은 거의 대부분. 사실 대부분이 창업을 실패하기 십상이지 그래도 그렇게 큰 손해 안 보고 권리금 받고 넘겼어. 그 언니는... 그 스물 세살짜리를 뭘 믿고 그런 걸. 같이 쫓아댕기면서 했을까. 그것 말고도 그 언니는 주변에 도와주는 사람이 있었어. 누군가가 있어야지만 사실 그런 것들이 가능해.

조울증으로 힘들었던 언니. 세신사 그만두고 한 언니  그래서 그런 일 이제 사실 가족이없고, 혼자고, 그냥 이제 조울증도 있고 지금 생각해보면. 근데 그 언니가 엄청 오랫동안 성매매를 했잖아. 나이가 많아졌고 그 당시에. 50대 였으니까 지금은 60대가 넘었긴 훨씬 넘었겠네요. 60대 중반 70이 되가는 언닌데, 그 언니가 그러니까 뭔가 되게 하루 항상 노력하는데 뭐가 잘 안 되는 것 같아요. 왜냐면 어쨌든 친구와 가족은 나를 이용해서 돈을 벌어 먹는 완월동에있는 그들 밖에 없는 거야. 뭔가를 하고 싶은데 다시  돌아가고 할 수 밖에 없는. 결국 그 언니에게 집이자 고향이 완월동인 거야. 그런 것들이 되게 안타깝지. 그때 되게 뭐라도 해보려고 노력은 하는데 그게 혼자 힘으로 할 수가 없는 거지.

제가 굉장히 지원을 오래 했던 언니가 있는데 완월동에 계신 분이에요 그 언니가 탈업소 해 여러 가지 자활하기 위해서 취업도 하고 열심히 생활하면서 철공소 같은 곳에 일을 했었어요. 근데 거기에 일을 하다가 언니가 화상을 입었어요. 그래서 돌아가셨어요. 굉장히 열심히 잘하기 위해서 노력하고, 너무너무 순하고 얌전하신 분이었는데,  하여튼 업소에서 나와서 뭔가 새로운 일을 찾아가지고 자기 생활을 꾸려가는 게 쉽지는 않았던 것 같아요.